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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영화 하얼빈 박정민 독립운동가, 우덕순의 삶과 의거

by issuehouse 2025.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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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과 함께 총을 들다:

잊혀졌던 독립운동가, 우덕순의 삶과 의거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울려 퍼진 총성은 단순한 총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의 심장을 겨눈 민족의 분노였고, 침략자에 대한 저항의 신호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날의 주인공을 안중근 의사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역사적 순간의 또 다른 주인공,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인물. 그의 이름은 **우덕순(禹德淳)**이다.


■ 출생과 초기 활동 – 평범한 상인이었던 청년

우덕순은 1879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났다. 호는 단운(檀雲). 그는 한학을 익히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청년 시절에는 서울로 올라가 동대문 인근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대한제국 사회는 외세의 간섭과 내부 혼란으로 피폐해져 가고 있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독립협회와 같은 계몽운동 조직에 참여하게 된다.

처음에는 평범한 민간인이었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국권이 침탈당하면서 그의 삶의 방향은 급격히 바뀌게 된다. 그는 현실 정치의 한계를 인식하고 무장 독립운동의 길을 택하게 된다.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독립운동의 본격화

1905년 이후 우덕순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하여 한인 학교를 세우고 청년 교육에 힘쓰는 동시에, 의병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계획했다. 1908년에는 약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국내로 진입, 함경북도 경흥과 회령에서 일본군을 습격하는 공격을 감행했다.

이 작전은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결국 그는 체포되어 함흥 감옥에서 7년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우덕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감옥을 탈출해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며 독립운동을 재개한다. 이 무렵 그는 안중근, 이범윤, 김기열 등과 깊은 연계를 맺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 단지동맹과 하얼빈 의거의 숨은 주역

1909년 봄, 우덕순은 동지들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는다. 왼손 약지를 자르고 태극기에 피로 서명하며 ‘조국 광복’을 다짐한 이 결의는 단순한 형식이 아닌, 생명을 건 약속이었다. 안중근은 단지동맹 후 더욱 명확한 방향을 설정했고, 우덕순은 이에 적극 동참한다.

같은 해 10월, 그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한다. 안중근은 하얼빈역, 우덕순은 채가구역에 각각 배치되어 작전을 준비한다. 결국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데 성공하고, 우덕순은 곧 체포된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고, 당당히 자신이 대한의군 참모이며 군사작전의 일부였음을 밝혔다.


■ 체포와 투옥, 그러나 끝나지 않은 투쟁

우덕순은 안중근과 함께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고, 일본의 군사재판을 통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과거 함흥 감옥에서의 탈옥 이력이 밝혀지면서 2년이 추가되어 총 5년형을 선고받는다. 1915년에 출옥한 이후에도 그는 다시 만주로 향해 교육과 종교 활동, 그리고 민족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하얼빈, 만주리, 치치하얼 등을 오가며 조선인 공동체를 조직하고 청년 교육에 힘썼으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 등 조용한 헌신을 이어갔다. 그는 대중의 이목을 끌지 않았지만, 독립의 날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투쟁했다.


■ 해방 후 활동과 비극적 최후

1945년 해방이 찾아왔을 때, 우덕순은 중국에서 한인 귀국 사업과 안중근 추모 활동에 집중한다. 그는 대한국민당의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며 새로운 조국 건설에 뜻을 두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남아 있던 그는 조선인민군에 의해 체포되어 9월 26일, 안타깝게도 총살을 당하게 된다.

그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뜻하지 않게 생을 마감하였지만, 그의 유해는 1970년대 후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고, 1962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오해와 논란 속에서도 빛나는 진심

우덕순은 생전에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논란이 있었고, 그가 조선인민회 회장을 맡았다는 주장이 일제강점기 말기 행적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다수의 평가와 증언, 그리고 독립운동사적 맥락에서 그는 명백한 ‘항일 독립운동가’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제천시와 충청북도, 제천문화원은 그의 생애를 기록한 인물전기를 발간하였고, 최근에는 영화 《하얼빈》에서 배우 박정민이 우덕순 역을 맡아 다시금 그를 대중에게 알렸다.


■ 결론 – 역사는 기억을 필요로 한다

우덕순은 조용히, 그러나 확고하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가 안중근의 의거에 함께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역사적 가치는 충분하다. 더욱이, 해방 후까지도 동포들의 귀국을 돕고 나라 재건에 힘을 보탠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진정한 ‘헌신’의 상징이다.

역사는 위인만을 기억해서는 안 된다. 빛나는 뒤편에서 함께 어둠을 견디며 싸운 사람들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덕순은 그 대표적인 이름 중 하나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는 그의 총성과 발자국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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